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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추천]공정하다는 착각.2020(2)

by 무어야! 2022. 10. 26.

 

능력주의의 허상

 능력과 노력만 있으면 모두에게 계층 상승의 기회가 있을 거란 능력주의는 사람들을 성공자와 실패자로 분류하게 만든다. 더욱더 최악인 것은 성공자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룬 성공이라는 보상에 대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함께 오만함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실패의 책임은 그들의 몫이라 여기게 한다. 실패자 자신 또한 자신의 무능력함을 느끼며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모두에게 성공의 기회를 보장해 주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일까?

 

 세계화의 흐름 속에 태어난 능력주의는 빈부격차의 증대 속에 상류층과 일반 노동자 계급과의 벽을 더욱 단단하고 높이 쌓아 올리게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시작점에서 경쟁이 가능하였다. 이때에는 대학 학위가 없어도 중산층의 삶이 가능한 시대였다. 하지만 1979년도에는 대졸자가 고졸자보다 40% 더 많은 수입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대졸자가 고졸자보다 80% 더 수입이 많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격차에 가속이 붙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 결과 고학력자는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되었고 일반 노동자는 세계화 시대 이전과 별 차이가 없는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격차를 보여주는 다른 예는 1970년대 말 CEO와 일반 노동자의 보수 차이는 약 30배였다. 하지만 2014년 이들의 보수 차이는 300배 차이가 난다. 

 

 이는 노동자 계급에게 경제적 곤경을 안겨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능력주의 시대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의 존엄성이 떨어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구직 포기뿐만 아니라 다수가 삶 그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신분상승의 기대감에 따른 설렘이 아닌 삶의 포기로 자살, 약물 과용, 알코올성 간질환으로 인한 사망에 이르고 있다. 대학이라는 선별에서 버려진 사람들의 일이 거의 대접을 못 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경제적 박탈뿐만이 아닌 문화적 소외의 복합물

 특권 엘리트 층들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학력주의 편견들은 노동계급의 불만이 커지게 만든 요인이다. 특히 주류 정당과 엘리트층들이 백인의 특권을 들먹이는 것은 그들보다 다수인 백인 하위계층들에게 무력감과 울분을 심어주게 된다. 백인 하위계층들은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져 생활하는 가운데 백인의 특권을 들먹이며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등에게 주는 복지와 혜택들에 새치기당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이런 문화적 소외의 복합물인 것이다.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들에 주는 복지 혜택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그들에게 인종주의자, 보수꼴통이라 비하하는 엘리트들에게 생기는 분노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실직자들의 고통은 소득이 없다는 데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없다는 데에서도 나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사회 속에 소외된 인간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경제적 관점으로만 접근을 해왔다.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동안의 세계화 결과 부는 최상층에게로 돌아가고 대다수의 노동자들의 사정은 거의 내지는 전혀 개선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그들이 중점에 둔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마저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경제 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는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를 금전적으로 풀이하는 악영향에 대해 모른 척 해왔다. 바로 이 점에서 노동계급의 분노는 경제적 공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잃은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정치적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 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다뤄야 한다. 즉, 우리가 경제적으로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비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왜 주류 정치인들은 주된 정치 어젠다를 정의의 기여적 측면과 생산자 중심 윤리로 하지 않는 것일까?

 경제 성장을 공공정책의 최우선으로 삼는 이유는 우리 사회처럼 갈등이 많은 다원적 사회에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골치 아픈 도덕 논쟁을 우회할 빌미가 된다. 잘 사는 삶이나 분배 정의에 대한 견해는 모두 다를 수 있겠지만 경제 파이를 키우는 것이 작아지는 것보다 낫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주류 정당들의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영구의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 유럽의 초극우 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글로벌, 능력주의,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은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대안의 프로젝트는 무엇일까?